앞선 글까지는 정유사와 검찰의 시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생활에 가까운 시선, 주유소와 운전자 입장에서 석유 유통 구조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전량구매계약, “이 간판을 다는 순간 선택지는 줄어든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SK, GS, HD현대, 에쓰오일 같은 브랜드 주유소 간판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 간판 뒤에는 전량구매계약이라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정 정유사의 간판을 단 주유소는 사실상 그 정유사에서만 석유제품을 공급받는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유사 입장에서는 자사 물량을 안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고, 브랜드 관리와 마케팅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유소 입장에서 보면 더 싼 공급처를 찾고 싶어도 사실상 다른 정유사로 갈아타기 어렵다는 제약이 생깁니다. 가격이 올라가도 계약 구조 때문에 당장 다른 회사로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구조는 정유사에게는 안정성을, 주유소에게는 구속을 동시에 가져다줍니다.
사후정산제, 운전자가 잘 모르는 가격 결정 방식
사후정산제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기름을 공급할 때 입금가와 확정가라는 두 단계로 가격을 정하는 방식입니다.
공급 당시에는 정유사가 임시 입금가를 통보합니다. 주유소는 그 가격을 기준으로 당장 판매가를 설정합니다.
나중에 정유사가 “이번 기간의 최종 공급가격은 이 정도였으니, 입금가와 비교해 차액을 정산하자”라고 통보하면, 주유소는 그에 따라 추가 비용을 내거나 환급을 받게 됩니다.
운전자 입장에서는 주유소 가격판만 보이기 때문에, 이 뒤에서 어떤 정산이 오가는지 잘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유소 입장에서는 실제로 얼마에 산 것인지를 초기에 정확히 알기 어려운 구조가 됩니다. 특히 유가가 크게 오르내리는 시기에는 입금가와 확정가 사이의 차이가 커질 수 있고, 정유사가 어떤 기준으로 확정가를 정하느냐에 따라 주유소의 손익이 크게 달라집니다.
이 때문에 사후정산제는 정유사가 가격결정 권한을 너무 많이 쥐고 있다는 비판과, 국제가격을 유연하게 반영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옹호가 늘 함께 따라다니는 제도입니다.
운전자 입장에서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운전자 입장에서 보이는 것은 결국 주유소 가격판의 숫자뿐입니다.
왜 국제유가가 내려도 주유소 가격은 한참 뒤에야 내려가는지, 왜 브랜드 주유소와 비브랜드 주유소의 가격 차이가 나는지, 왜 같은 동네에서도 몇십 원씩 차이가 나는지, 우리는 대체로 결과만 체감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주유소 사장의 마진, 정유사 공급가, 세금 구조 정도로 설명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전량구매계약으로 인해 다른 정유사로 갈아타기 어려운 구조, 사후정산제로 인해 공급 당시 최종 원가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구조, 정유사 간 가격 인상 시기와 폭을 둘러싼 미묘한 관계 같은 것들이 얽혀 있습니다.
운전자는 “왜 이 동네는 이렇게 비싸지?”라고 느끼고 끝나지만, 그 가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갑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이유
이번 유가 담합 사건에서도 검찰과 언론은 ‘갑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소가 함께 포함됩니다.
전량구매계약으로 인해 주유소가 특정 정유사에 묶여 있는 구조, 사후정산제로 인해 주유소가 공급가 변동을 주도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구조, 정유사가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가격과 물량, 거래 조건을 사실상 일방적으로 정하는 관행이 그 예입니다.
정유사 입장에서는 우리는 계약과 제도에 따라 합리적인 공급을 했을 뿐이라는 논리가 있고, 주유소나 영세 사업자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선택권이 거의 없었다는 감각이 있습니다.
운전자 입장에서는 이 모든 논쟁 뒤에서 그저 기름값이 비싸다는 결과만 받아들이게 되는 셈입니다.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논쟁은 계속된다
사후정산제와 전량구매계약은 우리나라 석유 유통 시장에서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관행입니다.
정유사, 주유소, 정부 모두에게 각자 나름의 이유와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유가 담합 사건처럼 과점 구조, 가격 인상, 갑질 논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 이제는 구조를 조금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개별 사건이 어떻게 결론 나더라도, 전량구매와 사후정산제가 지속 가능한 구조인지, 경쟁과 공정성 관점에서 어떤 개선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구조에서 계산되는 ‘피해액’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왜 검찰은 수십조 단위 피해액을 말하는지, 가상 경쟁가격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써서 숫자를 만드는지 조금 더 쉽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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