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보통 소설부터 떠올리죠.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읽은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떤 장면들이 “문장”이 아니라 “체온”으로 남아 있는 책이에요.

저는 언젠가부터 러닝도 하고, 철인3종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먼저 읽고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달리기를 하다가 이 책을 읽었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안 납니다. 다만 이상하게, 그 순서는 잊어도 책 속에 나온 아테네 마라톤은 잊히지 않더라고요.
이 책은 ‘러닝 에세이’가 아니라 생활의 기록

이 책을 러닝 팁 모음집처럼 기대하면, 조금 의외일 수 있습니다. 무라카미는 러닝을 ‘운동 지식’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자기 삶의 리듬을 유지하는 장치처럼 다룹니다.
특히 인상적인 건 형식이에요. 훈련일지처럼 날짜와 몸 상태가 스쳐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여행기처럼 장소가 바뀌고, 또 어느 순간은 글쓰기와 나이 듦, 습관 같은 이야기가 조용히 섞입니다.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달리기는 이렇게 해야 한다”보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이렇게 달린다”라는 말처럼 들렸거든요.
아테네 마라톤 장면이 유난히 생생했던 이유
제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리는 건 아테네 쪽 달리기 묘사입니다. 정확히는 ‘마라톤이 시작된 곳’에서 ‘아테네의 결승(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으로 이어지는 마라톤! 그 묘사였습니다.
실제 아테네 마라톤(‘The Authentic’) 코스는 마라톤에서 출발해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으로 들어오고, 42.195km 전 구간이 아스팔트라고 합니다. 중반 이후 특히 20~31km 구간이 계속 오르막이라 “정신이든 다리든” 버티는 구간이 되고, 31km 이후에는 내리막이 이어지면서 도시로 진입하는 흐름도 특징이고요.
이런 코스 설명을 다시 읽어보니, 왜 그 장면이 제 기억에 그렇게 또렷한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역사적인 장소’라서가 아니라, 달리기의 감정선(평지에서의 방심, 오르막의 침묵, 내리막의 안도, 도시로 들어갈 때의 소음)이 한 번에 그려지니까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아테네의 이미지는 “나도 언젠가 저런 루트를 달릴 수 있을까?” 같은 목표도 생겼었습니다. (지금은..?) . “러닝은 결국 혼자서 통과해야 하는 구간이 있다”는 기억이 많이 남았어요. 오르막에서 누가 대신 뛰어줄 수는 없잖아요.
다시 읽었을 때 새로 읽히는 부분
오래 달리다 보면, 달리기만으로는 조금 지겨운 감이 있더라고요. 수영, 자전거, 러닝이 합쳐진 경기라는 철인3종은 묘하게 저를 건드리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마라톤뿐 아니라 트라이애슬론(철인3종)을 언급하며, 그걸 준비하기 위해 수영과 자전거 훈련에 시간을 많이 써야 했다고 나오거든요. 저는 이 대목이 묘하게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멋진 도전담이라기보다, 그냥… 시간이 든다는 사실. 하고 싶으면 시간을 내야 한다는 사실. 그 단순함이요.

회사 다니면서 운동까지 끼워 넣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죠. 야근이나 회식이 있는 주에는 운동이 너무 너무 귀찮기도 하고요. 그럴 때 이 책은 “대단한 동기부여 문장”을 던지기보다는, 꾸준함이라는 되게 밋밋한 선택지를 조용히 남겨둡니다. 그래서 더 오래 가는 책이었던 것 같아요.
책을 놓으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러닝을 시작하라고 등을 떠미는 책이라기보다, 러닝을 이미 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확인하게 만드는 책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읽은 지 오래됐는데도 아테네의 장면이 유독 생생한 건, 아마도 그 묘사가 “장소의 풍경”이라기보다 “이런 대단한 작가도 힘들어했던 현실적인 감각”을 남겨서였겠죠.
저는 당장 아테네를 달릴 계획은 없습니다. 대신 오늘, 내일, 그리고 바쁜 주간 사이사이에 짧게라도 뛰는 쪽을 선택해보려고 합니다. 철인3종도 결국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수영하고 자전거 타고 달리는 아주 현실적인 반복의 합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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