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의 아픔이 담긴 음식, 중앙아시아 당근김치 '마르코프차'의 역사와 유래
최근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장면이 방영되어 많은 분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음식이 바로 '당근김치'인데요. "당근으로 김치를 담근다고?" 하고 의아해하신 분들이 많으셨을 겁니다.
사실 이 당근김치는 단순한 퓨전 요리가 아닙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중앙아시아 땅에 뿌리 내려야 했던 우리 고려인 동포들의 눈물겨운 역사와 삶의 지혜가 담겨 있는 특별한 음식입니다.

1. 배추를 구할 수 없었던 고려인들의 서글픈 지혜
당근김치의 공식 명칭은 러시아어로 '마르코프차(Morkovcha)'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마르코프'는 러시아어로 당근을 뜻하고, 뒤에 붙은 '차'는 고려말에서 나물이나 무침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지에서는 '코리안 샐러드'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죠.
당근김치가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고려인 강제 이주 사건 때부터입니다.
연해주에 살던 약 17만 명의 고려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추위와 기아 속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어떻게든 생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척박하고 건조한 중앙아시아 땅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늘 먹던 배추나 무, 고춧가루 같은 재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고향의 맛이자 생존에 필수적인 채소 반찬이 절실했던 고려인들은 현지 시장에서 가장 구하기 쉽고 저렴했던 당근에 눈을 돌렸습니다.
배추 대신 당근을 가늘게 채 썰고, 소금에 절인 뒤 고춧가루 대신 식초, 마늘, 식용유, 그리고 고수 씨앗 같은 향신료를 넣어 버무려 먹기 시작했습니다. 김치라기보다는 장아찌나 샐러드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이는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고려인들에게 소중한 영양원이자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습니다.
2. 중앙아시아의 입맛을 사로잡은 코리안 샐러드
처음에는 고려인들만의 서글픈 생존 음식이었던 당근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됩니다. 아삭한 식감과 새콤달콤하면서도 알싸한 향이 현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고려인들이 재래시장에서 당근김치를 팔기 시작하면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러시아와 동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오늘날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당근김치는 어느 대형 마트에 가도 쉽게 살 수 있는 국민 반찬이자 대표적인 '한국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름진 고기 요리나 빵을 많이 먹는 현지 식문화에서 새콤하고 매콤한 당근김치는 입맛을 돋우는 훌륭한 샐러드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배추김치가 아득한 만주와 중앙아시아의 바람을 타고 당근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변신하여 또 다른 대륙의 식문화를 정복한 셈입니다.
3. 잊지 말아야 할 민족의 애환과 문화적 유산
최근 한국에서는 프랑스식 당근 요리인 '당근 라페'가 유행하면서 당근김치를 라페의 한 종류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당근김치는 서양식 샐러드와는 그 근본부터가 다릅니다. 핏줄과 고향을 빼앗긴 채 낯선 땅에 버려졌던 우리 민족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빚어낸 역사적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방송을 통해 당근김치를 보며 신기해하는 것도 좋지만, 그 주황빛 깔끔한 맛 뒤에는 차가운 화물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던 고려인 1세대들의 눈물과 고통이 녹아있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혹시 기회가 되어 당근김치를 맛보시게 된다면, 그 옛날 척박한 땅에서 고향의 맛을 잊지 않으려 당근을 썰었던 고려인들의 따뜻하고 강인한 마음을 한 번쯤 떠올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